'슈퍼콘서트 17 에미넴/전문가 칼럼' (5건)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7 EMINEM은 끝났지만 그날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는 기상 상태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모두 에미넴과 혼연일체가 되어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7 EMINEM을 즐겼죠! 평소 극도로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에미넴의 하트 사인과 Dr.Dre의 스페셜 무대. 무엇보다 에미넴을 감동시킨 한국 팬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전설과도 같은 공연,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7 EMINEM의 자세한 공연 리뷰를 대중 음악 평론가이자 힙합 전문가 김봉현님의 글로 준비했습니다. 찬란했던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함께 보시죠!

 


  

장르 간 편을 가를 생각은 없지만 한국의 록 팬과 힙합 팬에게는 각자의 오랜 ‘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라디오헤드의 내한이었다면 후자는 바로 에미넴의 내한이었다. 한번 올 법도 한데 너무 안 오니까 온갖 억측이 무성했다. 소문의 잔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올해 거의 같은 시기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은 못 봐서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에미넴의 첫 내한 공연은 가히 ‘역사적’이었다. 

에미넴은 자신의 마지막 정규 앨범 이름을 본 딴 ‘The Recovery Tour'의 일환으로 일본을 거쳐 한국을 찾았다. 2010년부터 지속되어온 투어인 만큼 공연의 기본 골격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고 실제 공연 역시 그 범위 내에서 진행됐다. 세계 곳곳에서 공연이 시작하기 전 에미넴의 ‘부활’을 알렸던 영상이 이번에는 한국어로 흘러나왔고, 투어 이름대로 The Recovery 앨범 수록곡과 최근의 피쳐링 곡이 적지 않게 반영된 세트리스트 역시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함이 늘 평범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에미넴은 늘 보던 똑같은 옷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수백 번은 더 들었을 법한 노래들을 차례로 불렀지만 실제 연주에 기반을 둔 새로운 편곡,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라이브 솜씨로 2만여 관객을 열광시켰다.

 

공연은 저녁 7시를 조금 넘겨 시작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심한 수준은 아니었고 다행히 공연이 끝날 때까지 비는 심하게 내리지 않았다. 에미넴에 앞서 슬러터하우스가 먼저 무대에 올랐다. 슬러터하우스는 에미넴의 레이블인 셰이디 레코드 소속 4인조 랩 그룹으로 힙합 마니아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인정하는 4명의 (오래된) 래퍼가 결성한 팀이다. 흥미로운 건 멤버마다 출신지역과 행보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로이스 다 파이브 나인이 에미넴과 같은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에미넴과 교류를 해오며 언더그라운드에서 입지를 다져왔다면 조 버든은 지금의 포지션과는 상반되는 메인스트림 힙합의 최전선에서 데뷔를 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크루키드 아이는 미국 서부 힙합계에서 십 수 년 간 ‘리리시스트(lyricist)'로서 인정받아온 관록을 자랑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조 버든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역시 슬러터하우스의 무대는 명불허전이었다. 랩 실력만을 놓고 본다면 에미넴에게도 전혀 뒤질 게 없는 이들은 자신들의 히트곡과 며칠 후 발매될 새 앨범에 실릴 곡, 그리고 멤버들의 솔로곡을 적절히 섞어 공연했다. 특히 ‘2011 BET Cypher SHADY 2.0’에서 리아나를 언급해 화제가 되었던 로이스 다 파이브 나인의 랩이 쏟아질 때는 관객 일부가 “Hi, Rihanna" 부분을 따라 하기도 했다. 몰아치는 랩과 유머러스한 토크 타임이 어우러진 무대였고, 멤버들의 자기소개(?) 타임 때 크룩드 아이가 "I'm from the Westcoast!"라고 외치며 투팍의 ‘Hail Mary’가 흘러나오던 순간은 에미넴의 무대까지 통틀어서도 이 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40여분 가까이 무대를 달군 슬러터하우스는 “한국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인사를 끝으로 퇴장했다.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슬러터하우스가 퇴장했지만 에미넴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결과론이지만 아마 무대 뒤에서 ‘머리 위 손 하트’를 연습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사람은 관성의 동물이라 안하던 걸 갑자기 하면 체하기 때문이다. 8시에 등장하기로 했던 에미넴이 20분이 넘어도 등장하지 않자 관중은 술렁였고 급기야 동학 민란 수준의 폭동까지..는 아니고 ‘즐거운 볼멘소리’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25분 즈음이 되자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음악이 흐르고 영상이 나오더니 무대 밑에서 그 분이 올라왔다. 데뷔 후 13년 만에 한국을 첫 방문한 헤일리 아버님 되시는 분 말이다. 힙합 프로듀서로 이름이 드높은 알케미스트를 디제이로, 데뷔 때부터 동고동락해온 프로듀서 미스터 포터를 백업 래퍼도 대동한 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이 나왔던 사람들은 어느새 무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Won't Back Down'을 시작으로 약 85분간 이어진 26곡의 메들리는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응축된 엑기스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실제 연주로 다시 태어난 대부분의 곡은 ‘The Way I Am’의 웅장한 새 편곡에서 느낄 수 있듯 레코딩 버전과는 또 다른 감흥을 선사했다. 반면 몇몇 곡은 MR을 틀었고 어떤 곡은 AR을 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Till I Collapse’가 AR이었다. 추측하건대 에미넴의 라이브 실력이 출중함에도 이 곡을 AR로 설정한 건 아무래도 이 곡의 랩톤이 시종일관 격앙되어 있기에 완벽한 재현에 어려움이 있고, 이 곡에서의 랩이 에미넴의 커리어를 통틀어 베스트를 다투는 퍼포먼스였기에 일종의 안전장치(?)로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메들리’인 만큼 끊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흘러가는 음악의 흐름은 라이브 특유의 생동감은 물론 그 연결고리와 배열에 대한 음악적 호기심을 자주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Till I Collapse’와 ‘Cinderella Man’의 이어짐은 셋리스트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비슷한 질감의 타격감 강한 정박의 드럼’이라는 두 곡의 공통분모를 포착한 듯한 이 연결은 하마터면 곡이 바뀐 사실 자체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음악 자체 외에도 공연 내내 자잘하게 지속된 에미넴의 멘트와 소소한 이벤트는 공연의 또 다른 재미였다. ‘Lighters’가 흐를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도 라이터를 하늘 위로 들었고 ‘Airplanes, Part 2’가 나올 때는 관객의 머리 위로 종이비행기가 날아다녔다. 에미넴이 ‘Stan'의 가사중 'denver'를 'korea'로 바꿔 부를 때는 순간적으로 큰 함성이 분출되었다 사라지기도 했다. 비록 ‘No Love’를 부를 때 에미넴이 이 곡에 참여한 래퍼인 릴 웨인의 이름 ‘웨인’과 그의 애칭 ‘위지’로 호응을 유도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맥락을 모르고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호응했던 것이 살짝 옥의 티긴 했지만.

 

 

 

 

어쩌면 이 날 에미넴의 셋리스트는 그의 부침 많은 삶을 집약해놓은 것 같기도 했다. 단적으로 ‘W.T.P.’는 신나는 파티 곡이지만 여기서 가리키는 ‘화이트 트래쉬’는 사실 ‘백인 빈민’이라는 그의 태생을 지칭하고, 친모에 대한 욕설로 논란을 낳았던 ‘Kill You’와 훗날 그녀에 대한 애증을 털어놓았던 ‘Cleanin' Out My Closet’은 불우했던 그의 가정사를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Cleanin' Out My Closet’ 시작 전 “여기 부모님과 문제 있는 사람들 있나요? 그렇다면 외쳐봅시다. Fuck you Mom! Fuck you Dad!"라는 에미넴의 멘트에 많은 사람들이 폭소했지만 나는 쉽사리 웃을 수가 없었다. 한 때 고소까지 당했던 친모와 그의 관계가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왔는지 알기 때문이다. 또 약물중독과 함께 자신을 긴 슬럼프로 밀어 넣은 결정적 계기였던 절친이자 동료 래퍼 프루프의 죽음을 본의 아니게 예언(?)한 ‘Like Toy Soldiers’를 부를 때는 어김없이 이런 외침이 들렸다. “빅 프루프! 우린 널 그리워하고 있어!”

 

이렇듯 공연의 상황 중에는 ‘남녀 관객 간의 함성 대결’같은 The Recovery Tour의 공통의 준비된 이벤트도 있었지만 에미넴이 즉석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멘트도 있었다. 특히 에미넴은 이틀 전 일본의 정적인 공연 분위기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한국 관객의 각종 떼창을 비롯한 열광적인 반응에 진심으로 감동받은 듯 “너희들 날 도저히 떠날 수 없게 만드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금 인터넷에 새로운 욕설이라는 설, 두개골을 두 쪽으로 쪼개버리겠다는 뜻이라는 설, 실은 몰래카메라였다는 설, 겨드랑이 땀을 말리는 동작이라는 설, 모자에서 무얼 꺼내는 마술 동작이라는 설 등등 에미넴의 이러한 행위(?)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들끼리 치열한 논쟁이 불붙고 있는 ‘머리 위로 손을 모아 하트 그리기’ 동작을 관객에게 몇 번이나 선보였다. 과잉해석은 경계해야겠지만 에미넴이 한국 공연에 만족했음은 분명해 보였다. 참고로 내 해석은 ‘딸 해일리에게 배운 발레 턴 동작 준비설’에 가깝다.

 

 

 

 

공연의 하이라이트 두 가지를 꼽자면 역시 ‘닥터 드레의 등장’과 ‘Not Afraid의 떼창’이다(참고로 ‘Stan' 떼창과 앙코르 곡 'Lose Yourself' 1절 다 따라 부르기는 아쉽게도 밀렸다). 물론 앞서 열린 일본 공연으로 보아 닥터 드레의 등장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또 그 광경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니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이 밤 대신 이성의 끝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Next Episode'도 좋았지만 역시 ‘Forgot About Dre'가 너무 강했다. 1999년 당시 닥터 드레를 의심하고 그에게 도전했던 무리들을 마치 호위병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보호하던 열혈 청년 에미넴의 모습이 담긴 이 곡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운드와 기품 있게 공격적인 가사, 속도감 있는 래핑으로 힙합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싱글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이제 둘 다 마흔을 넘긴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한 곡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곡의 라이브를 보는 날이 생전에 올 줄이야. 에미넴과 마찬가지로 닥터 드레 역시 한국 관객의 놀라운 환호에 진심으로 만족한 듯 해맑게 웃어보였다. 물론 안 어울렸지만 진심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여담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닥터 드레의 등장은 일종의 '아시아 특수’가 아니었을까. 아, 또 하나. ‘My Name Is’ 대신 ‘Forgot About Dre, 그 12년 후'라는 부제가 어울릴 법한 ‘I Need A Doctor’에서 닥터 드레가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더 감격적이지 않았을까.

 

그런가 하면 ‘Not Afraid의 떼창’은 현대카드가 내건 이번 공연의 슬로건 ‘운명, 편견, 한계 이 모든 것들의 반대편에 서다’를 떠오르게 했다. 이 슬로건은 정작 에미넴의 음악에 대해 자세히 모르거나 힙합에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적지 않게 공연장을 찾은 중요한 이유를 이미 스스로 드러낸다. 에미넴은 ‘힙합’이나 ‘뮤지션’이라는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아이콘’과 같은 존재다. 단적으로 하얀색 피부를 가지고 흑인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힙합계의 정상에 올라선 에미넴의 스토리는 이미 음악이라는 특정 영역이 아니라 모든 인구와 계층에 소구 가능한 보편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의 부침 많은 인생 드라마의 절정이자 종착역에 바로 ‘Not Afraid’가 자리한다.


“난 두렵지 않아/ 당당히 맞서겠어/ 모두 이리로 와 내 손을 잡아/ 우리 폭풍을 뚫고 같이 걷는 거야/ 너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어/ 만약 너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느낀다면 한번 소리쳐봐” 모든 관객은 ‘Not Afraid’의 후렴을 소리 높여 따라 불렀다. 동의의 순간이자 응원의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공연의 존재의의이기도 했다.

 

 



앙코르 곡 'Lose Yourself'를 끝으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에미넴 커리어 최고의 트랙이 앙코르를 맡는 건 당연했다. 에미넴은 연신 “땡큐 코리아!”를 연발하며 영화 ‘8마일’의 마지막 장면처럼 무대 뒤로 퇴장했다. 9시 50분경이었다. 지금 나는 맨 뒤에서 3시간여 동안 바라보았던 보조경기장의 경관을 다시 떠올려본다. 웬만한 공연은 다 봤지만 ‘힙합’ 공연으로 한국에서 그만큼의 장관은 처음 본 것 같다. 단순비교에는 좀 무리가 따르겠지만 제이지나 카니에 웨스트가 해내지 못한 것을 에미넴이 해낸 느낌이랄까. 대단한 그 누가 온다 해도 별로 놀란 적이 없던 나 역시 이번에는 제대로 소원 성취했다. 미넴이 형은 나를 모르겠지만 데뷔 때부터 십 수 년 간 지켜봐온 나로서는 마치 동네 아는 형 같고 무언가 삶의 동반자 같은 느낌도 든다. 마흔을 넘겨 이제 본격 중년(?)으로 접어든 그의 앞에는 어떠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부디 한국에서 받아간 이 날의 수많은 마음들을 잊지 않길 바란다.


 

 

김봉현(대중음악평론가)

 

흑인음악을 중심으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THE EMINEM BOOK]을 포함해 5권의 저서 및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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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2.08.21 18:28 신고

    에미넴이 Cleaning out my closet 에서 멘트할때 도대체 누가 폭소를 했다는것이죠? 저도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_-

    • addr | edit/del 윗분 2012.08.21 18:51 신고

      본인 근처에는 몰라도 평론가분 근처에는 있었을 수도 있죠. 본인은 현장에 있던 수만명 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길.

  2. addr | edit/del | reply 윤정준 2012.08.21 19:02 신고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모든게 꿈만같네요

    좋은리뷰 감사합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가구역 여신 2012.08.21 20:02 신고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는 글이네요, 글쓴분은 누구신지 모르지만 에미넴은 잘 아는 그를 10여년간 음악으로 사랑했던 이만명중 한명으로 글을 읽고 조금 불쾌합니다~ 물론 각자 느끼는게 다르겠지만, 그 날 공연은 가히 최고였네요...
    비영어권 국가지만 가사 해석본과 한글로된 가사집을 들고 수십번 노래를 들으며 외우고 설레는 가슴으로 그를 기다렸던 팬들과 그 팬들에게 이례적인 퍼포먼스를 해준 아티스트, 이 두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공연이었습니다!

    • addr | edit/del 킹죠니 2012.08.21 20:14 신고

      저는 오히려 글 재밌게 봤어요 뭐 사람에 따라서 불쾌하게 느껴질수도 있고 하는거지만 ^^
      저도 솔직히 조금 안타까웠던 부분은 리뷰어 분께서 작성하신거랑 정확히 일치하거든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껴질수도 있으니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셔요

    • addr | edit/del sayto 2012.08.22 00:33 신고

      대체 이 글의 어디가 불쾌할 수 있는건지요?ㅎ

  4. addr | edit/del | reply 굿귯귬 2012.08.21 21:18 신고

    아...
    그날의 감동....
    ㅜㅜ
    에미넴 담에도 꼭와요...

  5. addr | edit/del | reply 굿귯귬 2012.08.21 21:18 신고

    아...
    그날의 감동....
    ㅜㅜ
    에미넴 담에도 꼭와요...

  6. addr | edit/del | reply 윤희형 2013.08.09 22:45 신고

    잘 읽었습니다.
    작년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천재적인 랩 실력과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직설적인 가사, 그리고 대중성과 작품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력으로 힙합의 역사를 다시 쓴 아티스트,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7 EMINEM. 힙합계의 판도를 뒤집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약물 중독과 아내와의 불화로 5년가량 활동 중단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2009년 Relapse와 2010년 Recovery를 발매한 두개의 앨범은 모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며 에미넴의 여전한 위상과 입지를 증명합니다. 에미넴의 '완벽한 재기'로 평가받는 Recovery가 탄생하기까지의 히스토리를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작가 배순탁님의 글로 만나봅니다.



모든 것이 흡사했다. 백인인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흑인의 로큰롤을 구사해 리얼부(富)를 축적했듯이 백인인 에미넴(Eminem)은 흑인의 전유물이었던 랩을 세계화해 대성공을 거머쥐었다. 이 ‘새천년의 엘비스 프레슬리’는 닥터 드레(Dr. Dre), 스눕 독(Snoop Dogg)의 네임 밸류를 훌쩍 뛰어넘었던, 힙합 필드 최초의 ‘월드와이드 슈퍼스타’였다. 
                 


                                                                                                                          이미지 출처: ()/()


바로 이 점, 랩 음악으로 흑인 소비자들을 뛰어넘어 더욱 폭넓은 팬 베이스를 구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미넴은 역사적 인물로 등재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데뷔를 앞둔 그를 향한 주변 관계자들의 초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피부색이 문제였다. 일례로 에미넴을 발굴하고 키워낸 닥터 드레마저 “왜 푸른 눈의 백인이 랩을 하게 하느냐. 그냥 록이나 하라고 그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앨범이 바로 통산 2집 The Mashall Mathers LP 였다. 1999년의 데뷔작 The Slim Shady LP로 주목을 이끌어낸 에미넴은 이 앨범으로 마침내 미국 사회에 '빅 트러블'을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앨범 타이틀을 보면, 슬림 셰이디(Slim Shady)는 에미넴의 가명, 마샬 매터스(Marshall Mathers)는 본명이다. 본명에 M이 두 개라서 M&M=Eminem이 된 것.)

주변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던 문제아인데다 음악 역시도 메시지가 지나치게 공격적인 나머지 비난이 끊이질 않았지만, 누구도 에미넴에 관해 의문부호를 달 수 없었던 ‘진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랩 실력이다. 에미넴은 ‘Kill You’에서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긴 호흡, ‘The Real Slim Shady’에서의 팝 적인 접근, ‘The Way I Am’에서의 거친 록의 면모 등,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래핑으로 듣는 이들에게 압도적인 청취 경험을 선사했다. 여기에 영국 여가수 다이도(Dido)의 ‘Thank You’를 샘플링한 ‘Stan’은 그 친근한 대중성으로 음반 판매에 가속도를 더해줬다. 앨범은 현재까지 1,900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The Mashall Mathers LP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랩 음악으로는 최초로 ‘올해의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발매한지 일주일 만에 미국에서만 179만장이 팔리면서 ‘발매 첫 주 최다 판매 솔로 아티스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등, 다른 수치들도 당시의 ‘에미넴 열풍’을 대변해주는 증좌였다. 롤링 스톤과 타임 같은 대형 잡지들 역시 ‘올해의 앨범 리스트’에 The Mashall Mathers LP를 포함하면서 그 대열에 기꺼이 동참을 선언했다. 극단으로 엇갈린 피드백이 없지는 않았다. 경이로운 래핑과 음악적 센스에 찬사를 보내는 쪽과 빌보드 편집장이었던 고(故) 티모시 화이트(Timothy White)처럼 ‘세상의 고통을 악용해 장사하는 앨범’이라며 그를 살생부에 올렸던 쪽이 첨예하게 날을 세워 대립했다. 여기에 캐나다에서는 재무장관 짐 플라허티(Jim Flaherty)까지 나서서 “역겹고 폭력적이며, 여성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국가 차원에서 앨범 판매 금지를 건의할 정도였다. 또한 그가 흑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비판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분명 진실이었다.

하지만 후속작 The Eminem Show(2002)가 다시 한번 초석을 다지고, 같은 해 개봉한 자전적 영화 8마일(2002)의 주제곡 ‘Lose Yourself’로 아카데미까지 휩쓸면서 그 누구라도 당시가 ‘에미넴 시대’였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어느새 에미넴은 ‘공공의 적’에서 ‘음악적 우상’으로 발돋움해버렸던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위기는 바로 그 즈음에 찾아왔다. 2004년에 선보인 Encore가 현저하게 낮은 반응 속에 시장에서 평범한 성적을 거두고 만 것이다. 물론 에미넴이 정상으로 복귀한 현재에는 애써 이 작품의 장점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엄격하게 논하자면 Encore는 전성기의 그것에 확실히 못 미치는 랩과 음악들을 담고 있었다. 흑인음악평론가 김봉현의 평을 빌리자면, “컨셉트에는 동어반복의 느낌이 있었고 프로덕션도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차트 성적은 물론 나쁘지 않았다. 변함없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싱글 쪽에서는 ‘Just Lose It’, ‘Mockingbird’ 등이 상위권에 포진했으니까 말이다. 이후 에미넴은 5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Relapse(2009)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그리고 발표된 작품이 바로 에미넴 스스로가 ‘완벽한 재기’라고 생각한 Recovery(2010)였다. 일단 앨범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본작으로 에미넴은 팝 신의 고원(高原)으로 컴백했다. 리아나(Rihanna)와 듀엣으로 발표한 ‘Love The Way You Lie’와 ‘Not Afraid’가 모두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재기의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음반으로 그는 570만장의 세일즈를 기록, 2010년 판매 왕의 자리에도 등극했다.

‘회복’이라는 타이틀이 증명하듯, 에미넴이 음반에서 추구했던 것은 비단 음악적인 면뿐만이 아닌 음악 외적인 면에서의 ‘정상 컨디션 찾기’였다. 마약, 이혼과 같은 스캔들에서부터 파파라치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사생활 등, ‘Lose Yourself’ 대성공 이후 그는 인기에 취하고 스트레스에 못 이겨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에미넴은 Relapse로 오랜만에 상승곡선을 그린 뒤, Recovery를 통해 2000년대 초반 누렸던 ‘주라기 시대’에 필적하는 수준의 음악을 시범, 그야말로 ‘왕의 귀환’을 선포했던 것이다.

 



솔로 활동 외의 프로젝트에서도 에미넴은 완연한 회복세를 드러냈다. 스타일은 조금 달라졌지만 72년생으로 40세 언저리가 되었는데도 독침처럼 쏘아대는 래핑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동료인 로이스 다 파이브 나인(Royce Da 5'9")과 배드 미츠 이블(Bad Meets Evil)이란 듀오를 조직해 발표한 프로젝트 앨범 Hell: The Sequel의 수록곡 ‘Fast Lane'이 대표적이다. 진심 이 곡에서 만날 수 있는 에미넴의 래핑은 The Marshall Mathers LP 시절 뺨치기에 충분하다. 이 환상적인 곡으로 에미넴은 ‘랩을 예술의 경지’로 다시금 끌어올렸다.




2011년, 에미넴은 Recovery로 빌보드 어워드 뿐만 아니라 그래미 랩 부문 트로피까지 거머쥐면서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현재까지 그의 통산 앨범 판매고는 무려 9000만장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2년 8월 19일, 그 역사적인 아이콘을 눈앞에서 만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Writer. 
배순탁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음악이라는 느낌의 층위에서 당신과 나는 대체로 타자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짧지만 강렬한 순간들도 있다.
그 순간을 오늘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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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셋리스트 2012.08.14 11:37 신고

    안나와요??????????????아님공연당일날 나오나요.......................?

 

 

90년대 노터리어스 B.I.G.와 투팍으로 대변된 이스트코스트 힙합과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격돌에 이어 에미넴의 등장과 함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는 비로소 힙합 음악의 전성기가 도래하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전 세계 팝 시장이 힙합과 알앤비 음악 스타일로 한층 융성해진 결과, 한국 음악계 역시 미국 팝 음악과 경계를 허물고 미국 힙합과 알앤비는 자연스레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음악적 자원으로 스며들어 왔는데요.

한국 힙합이 탄생한 지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해외 힙합의 계보를 다룬 지난 시리즈에 이어 본 포스트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힙합의 계보를 그려봅니다.

한국에 들어온 힙합이라는 이름의 씨앗 

한국에 힙합을 들여온 문익점은 1990년대 초반 입국한 교포이자 유학생이었다. 지금이야 에미넴의 새 뮤직비디오가 뜨자마자 전 세계인이 유튜브를 통해 보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 점이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다. 어른들이 코끼리 밥솥과 호랑이 연고를 갈망하는 사이 아이들은 새로운 문화를 갈망했다. 일찍이 미군이 뿌리 간 로큰롤, 소울, 펑크, 블루스의 후예는 빽 판을 통해 암암리에 전해졌다.

수입이 금지된 일본 문화 역시 복사 비디오테이프와 보따리상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3G와 WIFI로 소통할 수 없는 시대에 이러한 문화는 주로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교포와 유학생이 뿌린 힙합이라는 씨앗은 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던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싹을 틔웠다. 당시 압구정동에 있던 상아 레코드는 수입 힙합 CD라는 킬러 콘텐츠를 발견했다. 헐렁한 바지를 입은 흑인과 눈에 띄는 화려한 폰트 그리고 '어른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딱지가 붙은 힙합 수입 CD는 갓 힙합을 접한 압구정동에 살던 청소년들의 눈길을 끌 만했다. 라이센스 보다 비싼 수입 CD를 산 그들은 듣고 또 들었다. 밤에는 AFKN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그때 산 힙합 CD를 들으며 음악을 따라 만들었다. 힙합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정보도 소스도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힙합의 창시자들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힙합을 탄생시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은 대중음악 계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듀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음반의 Thanks To에는 상아 레코드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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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통해 젊음의 아이콘이 된 힙합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힙합이라 보긴 어렵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에 최초로 '랩'이라는 형식을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덕분에 이제 대중음악에서 랩을 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듀스의 롤 모델은 뉴잭스윙의 창시자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Teddy Riley)다. 이들은 라임에 맞춰 랩을 하고 기존 흑인 음악의 샘플을 쓰는 등 가장 힙합에 가까운 음악을 들려줬다. 2집 DEUXISM에 수록된 '무제'의 원래 제목이 'Hip Hop'이었으나 사전 검열 시 불량한 이미지라는 이유로 제지를 당해 제목을 바꾸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미디어를 탄 힙합의 전파에 가속도가 붙었다. 꽃을 피우고 꽃가루를 날리며 여기저기 싹을 틔워대기 시작한 것이다. 통이 큰 바지를 입는 청소년이 늘어났고 일부는 힙합 CD를 사기 위해 압구정동으로 원정을 왔다. 레코드점에서 모인 이들은 새로운 힙합 음악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한국어로 랩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들은 곧 장소와 관계없이 모일 곳을 발견한다. 바로 PC 통신. 당시 PC 통신은 느렸고 매달 이용료를 내야 했으며 그걸로 모자라 쓰는 만큼 전화비가 나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PC 통신에 모였다. 왜? 새로운 문화를 공유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부터 판타지 소설까지, PC 통신 서비스엔 취미를 공유하고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이들로 가득 찼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가장 뜨거운 문화였던 힙합도 예외가 아니었다.

PC통신과 클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언더그라운드 힙합 하이텔에선 블랙스라는 힙합 동호회가 탄생했다. 통신사의 크기만큼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힙합 동호회였다. 이들은 PC 통신을 통해 서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자주 모임을 했다. 지금이야 쉽게 MP3를 전송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서로의 CD를 테이프에 복사해 돌려 들어야 했다. 이렇게 만난 이들은 곧 직접 음악을 만들어보자 의기투합한다. 직접 CD를 구워 만든 “검은 소리 –  첫 번째 소리”는 바로 그때의 결과물이다. 이후 이들이 친목활동을 넘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요람 마스터플랜[각주:1]이 바로 그곳이다. 블랙스[각주:2] 출신의 음악가로는 가리온과 주석 등이 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미료도 블랙스에서 활동했다.)

97년 생긴 클럽 마스터플랜에선 매주 토요일마다 힙합 공연이 열렸다. 초창기엔 블랙스 회원만 활동하다 오디션을 통해 어디에선가 온 친구들이 늘었다. 블랙스 회원 중심이던 관객도 점차 늘기 시작했다. 마스터플랜은 공연이 있는 모든 요일의 공연 프로그램을 힙합으로 채우고 바꾸고 힙합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리온, 주석, 다 크루 등의 음반과 몇 종류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표된다. 2001년 12월 여러 사정으로 클럽 마스터플랜은 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힙합 레이블 사업을 시작한다. 참고로 지금은 모든 걸 총괄하는 마스터플랜 그룹이 되어 매년 열리고 있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마스터플랜과 소속된 음악가들이 큰 인기를 얻은 이후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은 마스터플랜파와 반 마스터플랜파로 나뉘었다. 당시 한국 힙합 신의 규모를 생각할 때 질투와 편 가르기에서 시작된 유치한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힙합은 본래 경쟁 문화다.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것이 탄생한다는 힙합의 메커니즘은 힙합을 정체되지 않는 쿨한 음악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SNP[각주:3]에서는 마스터플랜에 소속된 음악가들에게 라임이 1차원적이라는 이유로 도발을 걸었다. 해외는 다음절 라임을 통해 더욱 랩을 깊게 즐기는 방법이 선보였는데 마스터플랜 소속 음악가는 단순한 라임만 구사한다는 것. 이들의 주장은 찬반이 나뉘긴 했으나 설득력 있었고 곧 대세가 된다.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것을 탄생시킨 것이다. SNP 출신의 음악가는 버벌 진트와 데프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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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다양한 형태로 가지를 뻗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성장과 함께 이런저런 컴필레이션이 발표됐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마스터플랜에서 발표한 초, 대박, 풍류 등의 시리즈와 1999 대한민국, 2000 대한민국, 2001 대한민국이 발표됐다. 이 중 2001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시리즈를 기획했던 이가 갈라지며 서로 다른 음반이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힙합 컴필레이션이 장사가 되던 시절이다.

오버그라운드에서도 다양한 힙합 음악가가 얼굴을 비췄다. 눈에 띄는 건 업타운과 드렁큰 타이거와 같은 교포 출신의 그룹. 이들은 본토에서 힙합을 듣고 자라났다는 강점을 내세워 '힙합을 알려주기 위해 왔다'는 콘셉트로 활동했다. 이는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음악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한밤의TV연예에서 마련한 랩 배틀에서 김진표는 영어로 랩을 하는 바비킴을 향해 한국이니 한국말로 랩하라는 랩을 하기도 했다. 댄스에 랩을 입힌 유사 힙합이 아닌 본토의 그것에 가까운 힙합을 대중들에게 알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한국 정서와 교감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현재는 한국 힙합이 성장하며 본토와 차이가 줄어들고 이들 역시 꾸준한 노력을 한 덕에 이들에게 씌워진 '교포 힙합'의 이미지는 많이 벗겨진 상태다.

가족의 탄생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 킵식스를 제작했으나 실패한 양현석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댄서였던 션과 솔로 활동을 했던 지누를 모아 지누션을 만든다. 1997년 양현석과 이현도의 프로듀싱으로 발표된 지누션의 첫 음반은 큰 인기를 얻고 YG 엔터테인먼트(당시는 양군기획)는 흑인 음악에 기반을 둔 레이블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이후 제작한 원타임의 인기에 힘입어 크게 성장한 YG는 흑인 음악 무가지 '바운스'를 창간하고 NBINB를 인수해 힙합 클럽 NB를 만들고 힙합 브랜드 MF!를 런칭하는 등 힙합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 휘성, 거미, 렉시, 빅마마 등을 연이어 성공시킨 YG는 탄탄한 프로덕션 시스템 구축과 함께 빅뱅과 2NE1의 큰 성공으로 이제 힙합이 탄생한 곳에서 관심을 받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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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의 특징 중 하나는 무리 짓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갱 문화와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고 다른 음악에 비해 레고 블록처럼 합체와 분리가 쉬운 탓도 있다. 근본적으로 경쟁 문화이니 쪽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것도 한 몫 할 테다. 그러한 지점에서 생겨난 독특한 개념 중 '크루'라는 게 있다. 일견 친목 모임으로 보이기도 하는 크루는 소속사가 다르고 활동하는 무대가 달라도 언제나 서로 지지하고 음악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단체를 뜻한다. 드렁큰 타이거를 중심으로 모인 무브먼트는 한국에서 제일 크고 가장 유명한 크루다. 드렁큰 타이거, 윤미래, 다이나믹 듀오, 리쌍, 에픽 하이, 양동근, 은지원, 비지 등 한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와 로스코 우말리(Roscoe Umali), 미키 아이즈(Micki Eyez)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음악가까지 포함하는 무브먼트는 드렁큰 타이거 2집에 수록된 ‘The Movement’라는 곡으로 처음 존재를 알렸다. 그 밖에 소울 컴퍼니, 오버클래스, 빅딜, 스나이퍼 사운드, 일리어네어 등 무수히 많은 레이블 혹은 크루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며 한국 힙합의 주요 줄기를 이루고 있다.

에미넴에게 영향 받은 한국 힙합

에미넴이 대중들에게 주목 받은 건 ‘My Name Is’ 부터이다. ‘My Name Is’의 폭발적인 인기는 당연하다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닥터드레의 탄탄한 비트 위에 놓인 에미넴의 랩 실력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점. 그 랩 안에 담긴 가사가 미국 코미디 쇼처럼 유명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풍자와 블랙 유머로 가득 차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내는 이가 힙합 신에서는 소수자에 속하는 백인이었다는 점. 에미넴은 훌륭한 래퍼일 뿐 아니라 영리한 전략가이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슬림 셰이디(Slim Shady)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했다는 점이다. 슬림 셰이디, 에미넴의 본명인 마샬 마더스(Marshall Mathers), 에미넴이라는 세 캐릭터는 분열을 일으키고 충돌하고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에미넴은 한국에서도 힙합 신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큰 인기를 얻으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 힙합 신의 미래 이러한 점 하나하나가 모여 서로 관계를 맺고 차례대로 쌓여 한국 힙합 신은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확장했다. 듀스를 보고 자란 이가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들은 이가 새로 음악을 만들었다. 기존에 음악을 하던 이들은 새로운 음악에 자극을 받아 분기탱천해 자신의 경험과 함께 더 나은 음악을 만들었다.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드렁큰 타이거가 언급했던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큰 어른 가리온은 2011년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했다. 마스터플랜에서 CB 매스로 활동하던 다이나믹 듀오는 자신의 레이블을 차리고 슈프림 팀이나 프라이머리 같은 실력 있는 후배 음악가를 영입하고 있다. 대중음악 신에서 천덕꾸러기로 취급 받던 힙합이 이제 다채로운 현상과 사례를 만들며 스스로 순환하는 신을 만든 것이다. 아직 한국 힙합의 미래는 순탄하지 않다. 힙합 음악을 즐기는 층이 특정 연령대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과 프로덕션 측면에서 미국 힙합의 유행에 기대는 점이 크다는 건 위험 요소다. 아이돌 중심으로 재편된 가요계 역시 힙합 신에 좋은 요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힙합에 기대를 건다. 여전히 한국 힙합은 흥미롭고 멋지며 가능성이 큰 음악이니까.


윤민훈(@HAVAQQUQ)

음악을 듣고 음악을 틀고 음악을 만들며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자영업자.
GQ, DAZED & CONFUSED, MDM 등의 매체에 기고하고

Deep!
Dope! Tight!, Turn Up The Night 등의 파티에 참가 했으며
현재는 영기획
| YOUNG,GIFTED&WACK (WWW.YOUNGGIFTEDWACK.COM)을 운영하고 있다.








  1. 1. 마스터 플랜: 주석, 데프콘, 인피니트 플로우 등 국내 힙합 뮤지션들이 포진해있으며, 초기 힙합음악 전파에 기여한 대표적 힙합 크루 [본문으로]
  2. 2. 블랙스: PC통신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본문으로]
  3. 3. SNP: PC통신 나우누리에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힙합 크루. 나우누리의 흑인 음악 소모임에서 1999년 정식 출범 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PC 통신의 쇠퇴와 함께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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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라이 2012.07.02 04:03 신고

    에미넴콘서트가 두달도 안남은 상황에서 인터넷을 대충살펴보니

    에미넴 노래특성상 등급을 19금으로 바꿔서 완전히 즐기자는 성인파와

    우리도 볼권리가있다 라는 미성년파 이렇게 나뉘어 지는데 결론은

    현대카드가 잘못한거지

    애초에 공연을 2회차로 협상을 봐서 19금 1회 15금 1회 이렇게 할수도있는데 말이야

    근데 솔직히 나도 19금이었으면 하고 미성년자는 짜져 라는 입장이지만

    같은 팬심으로써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어느정도 콘서트가 순화되어도 이해가능

    근데 12세는 아니잖아요 미친놈들아 -ㅅ-;;

    이게 어떤상황이냐면


    매실쥬스를 예로 들어서 그원액을 먹으면 엄청시고달고하지만 그맛만의 매력이있는거고(진한맛)

    어느정도 물을섞으면 적당히 상쾌하고 달콤한 맛이되는거고

    근데 억지로 너무많은 물을섞으면 더 많은 사람이 먹을순있어

    근데 그 맛은 밍밍하고 차라리 안하니만 못한 상황이되는거라고


    알겟냐 현대카드 양아치 쉐이들아?


    ps: 그래도 현대카드로 하루 선예매하게해준건고마워 8월19일날 보자

  2. addr | edit/del | reply tretre 2012.07.02 09:29 신고

    와웅 서태지와 아이들 및 듀스 등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 한국 힙합이 이렇게 발전되었군여 ㅋ 잘 읽었어용....

  3. addr | edit/del | reply 쿠드락 2012.07.02 16:19 신고

    맛깔나는 내용 한국힙합의 발전내용 너무 좋아요ㅋㅋㅋ

  4. addr | edit/del | reply LUV-_- 2012.07.02 17:48 신고

    확실히 우리나라 힙합은 제한적인 부분이 너무 많지 제한적이라기 보단 제약이 많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에미넴 같은 래퍼가 탄생하길 기도해본다

  5. addr | edit/del | reply 광고안해요? 2012.07.04 12:35 신고

    빨리 광고내주세요
    마룬5 도 티켓팅하자마자 광고나왔는데....
    !!!부탁합니다

  6. addr | edit/del | reply DRDRE 2012.07.10 10:36 신고

    정교하게 집필했네용


횟수를 더해갈수록 매번 더 큰 놀라움을 선사하는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7의 주인공 에미넴은 시대를 관통하며 힙합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입니다. 힙합 음악의 융성기였던 1990년대가 에미넴의 등장과 함께 마무리 되었다면, 2000년대의 전체적인 힙합 씬을 리드머의 편집장인 강일권님의 글을 통해 돌아보며 에미넴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팝 음악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새 천 년의 힙합 신, 그 중심에 선 에미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가 음악적 완성도와 다양성 면에서 ‘힙합의 황금기(Golden Age)’라 일컫는 1990년대는 에미넴이라는 가공할 랩 괴물의 등장과 함께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어진 힙합 신의 새 천 년은 더욱 진한 장밋빛으로 물들어갔다. 힙합음악이 미 대중음악 판의 인기있는 장르에서 팝 음악계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흐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힙합 신은 소울풀한 샘플링(Sampling)과 루핑의 미학, 그리고 정박의 둔탁한 붐뱁(Boom-Bap) 비트로 대표됐던 90년대보다 사운드와 스타일 면에서 굉장히 다양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다. 4분의 3박자가 주를 이루던 비트는 변칙적으로 쪼개지기 시작했고, 기존에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됐던 일렉트로니카, 하우스 음악과 결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진정성 면에서 무시당하던 팝-랩(Pop-Rap)이 제도권 안에 진입하는 등, 여러모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한편으로 예전 스타일을 고수하거나 끊임없이 실험을 감행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운집한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 역시 왕성하게 돌아가면서 양질의 결과물을 계속 쏟아냈다. 흡사 제다이들이 염원하는 ‘포스의 균형’이 이루어진 광경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였다.


비트 마에스트로 닥터 드레의 2001, 새 천년 힙합 신의 서막을 열다

새 천 년 힙합 신의 화려한 서막을 연건 바로 닥터 드레(Dr.Dre)의 두 번째 정규앨범 2001이었다. 음악계에 큰 파문을 몰고 왔던 걸작 The Chronic이후, 약 7년 만에 발표된 이 앨범은 닥터 드레가 일전에 쥐-펑크(G-Funk)라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선보여 세계 음악 팬을 충격에 빠트렸듯이 바람직하게 진일보한 웨스트코스트 힙합 스타일과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놀라운 사운드로 다시 한 번 음악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데스로우(Death Row)를 나와 독자적인 레이블 애프터매스(Aftermath)를 설립하고 새로운 사운드의 개발을 위한 과도기를 거쳐 에미넴의 The Slim Shady LP와 이 앨범으로 다시 왕좌를 탈환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두 앨범으로 촉발된 닥터 드레 사단의 폭격은 에미넴의 세 번째 앨범 The Marshall Mathers LP와 피프티 센트(50 Cent)의 첫 번째 정규앨범 Get Rich or Die Tryin'으로 이어지며 정점을 찍는다. 2000년대 초반의 힙합 씬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이 두 작품을 간단히 살피고 넘어가 보자.


닥터 드레 사단의 융단 폭격, 그 중심에 있던 두 장의 앨범

에미넴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미국 힙합 신에서조차 ‘사이코’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그의 가사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랩 실력과 기가막힌 스토리텔링 능력을 바탕으로 듣는 이를 사로잡았는데, 이 앨범에서는 삶과 자신을 돌아보는 좀 더 진중한 자세가 더해지면서 완전체에 가까운 모습을 선보여 다시 한번 넋을 빼놓았다. 특히, ‘Stan’에서 에미넴이 보여준 현장감 넘치는 전개와 극적 반전은 오늘날까지도 평단과 힙합 팬들이 회자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본작은 RIAA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미국레코드협회)로부터 발매 11년 만에 다이아몬드(Diamond/필자 주: 미국 내에서 물리적인 음반으로 천만 장 이상 팔린 레코드) 인증을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이룩했다.
 


그런가 하면, 언더그라운드에서 악명(?)을 떨치다가 닥터 드레와 에미넴의 눈에 띄어 메이저에서 데뷔하게 된 피프티 센트(50 Cent)의 이 앨범 역시 에미넴의 작품 못지않게 상당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주류시장에서 그 영향력이 사라지다시피 했던 갱스터 판타지를 다시금 화두로 삼았던, 21세기 갱스터 랩의 시작이자 결정판이었다. 그는 실제 총격을 당했던 일화를 비롯한 실화와 허구를 오가는 갱스터 로망을 연출하는 데 집중하면서도 클럽과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음악을 곁들이며 대중과 접점까지 이루는 데 성공했다.

 

새 천 년 힙합 신의 또 다른 주역들

닥터 드레 사단과 더불어 새 천 년 힙합 신의 시작을 이끈 대표적인 이들로는 제이-지(Jay-Z), 넵튠즈(Neptunes), 아웃캐스트(Outkast), 릴 웨인(Lil Wayne),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제이-지는 거리에 기반한 하드코어 랩퍼로 시작하여 힙합 거물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 클래식 The Blueprint를 발표했으며, 90년대에는 보조 프로듀서로 간간이 앨범에 참여해오던 넵튠즈는 특유의 미니멀한 비트를 완성하여 그들의 랩 페르소나인 클립스(Clipse)를 통해 선보이며 한동안 신의 트렌드를 선도했다. 

또한, 데뷔앨범 이후, 충격적일 정도로 파격적인 하이브리드 힙합을 선보여오던 애틀랜타의 두 기인 아웃캐스트는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은 Stankonia와 Speakerboxxx/The Love Below 등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고(필자 주: Speakerboxxx/The Love Below는 에미넴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다이아몬드를 기록한 작품이다), 그저 인기 좀 있는 랩퍼에서 어느 순간 또 다른 랩 괴물로 성장한 릴 웨인은 Tha Carter 시리즈와 믹스테잎을 통해 신에서 가장 바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 트렌드를 주도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만한 앨범으로는 제이-지의 The Blueprint와 칸예 웨스트의 The Late Registration를 들 수 있다.


샘플링 작법의 판도를 바꾼 클래식 Jay-Z의 Blueprint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90년대부터 차곡차곡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오던 제이-지는 바로 이 앨범을 통해 ‘클래식’을 보유한 힙합 뮤지션 중 한 명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놀라웠던 부분은 앨범의 프로덕션 절반을 (당시로써는) 신예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눈에 띠었던 인물이 칸예 웨스트였다. 칸예는 옛 선배들의 소울 샘플링에 기반하면서도 특유의 세련된 사운드로 마무리한 비트를 제공하며, 이미 다양한 스타일을 떡 주무르듯 연출하던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와 함께 본작의 완성도를 책임졌다. 이미 랩퍼로서 재능에 있어서는 더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제이-지는 그의 커리어 최고의 비트로 앨범을 꾸림으로써 새 천 년을 여는 또 한 명의 힙합 아이콘이 되었으며, 오늘날 힙합계의 거물이 되는 초석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힙합 스케일 확장의 효시가 된 작품 Kanye West의 The Late Registration

The Blueprint를 통해 일약 주목받는 프로듀서로 부상했던 칸예 웨스트는 데뷔앨범 The College Dropout에서 랩퍼 겸업을 선언함과 동시에 기존 샘플링 작법의 기본적인 룰은 고수하되 보컬 샘플의 피치를 잔뜩 올리는 특유의 작법으로 새로운 한 획을 긋기에 이른다. 이후, 칸예 웨스트는 오케스트라 스트링 세션을 비롯한 리얼 연주와 디지털 샘플링의 조합으로 무장하고 이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에 사운드와 곡의 구성, 그리고 전개를 팝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는 파격을 시도하면서 본작은 평단과 팬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앨범 이후, 음악적으로 힙합의 전형성에서 탈피한 음반들이 본격적으로 주류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만큼 오늘날 힙합 음악의 스케일 확장의 효시가 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막 12년여가 흐른 2000년대의 힙합 신은 1990년대부터 활약해오던 진짜배기 베테랑들과 제이콜(J. Cole), 빅 크릿(Big K.R.I.T), 왈레이(Wale), 커런시(Currensy), 위즈 칼리파(Wiz Khalifa),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등등, 앞으로 신을 책임질 신진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매우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들 대부분의 인기와 영향력은 단순히 힙합 신을 넘어 팝 음악계 전반에 다다르고 있을 정도다. 랩/힙합 음악이 빌보드 차트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힙합 뮤지션들은 빈민가에서 자수성가한 흑인으로서 게토의 롤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는 상품으로서도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 에미넴이 있다. 그는 The Marshall Mathers LP뿐만 아니라 The Eminem Show로도 천만 장 이상 판매량을 기록한, 두 장의 다이아몬드 앨범을 보유한 유일한 힙합 뮤지션이며,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유일무이한 힙합 뮤지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이미 최고의 성과를 거둔 그가 앞으로 그려나가고자 하는 청사진은 어떨지 매번 궁금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강일권

흑인음악 미디어 리드머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네이버 '이주의 발견' 해외부문 선정 & 집필

이 외 여러 신문,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흑인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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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레전드 2012.06.22 19:26 신고

    전설들이 여기다 모여있네....

  2. addr | edit/del | reply 아직도 2달남음 2012.06.23 16:16 신고

    셋리스트는 언제나오려나?
    물논 대부분의 곡들은 외우고 있지만
    난 완벽주의자라

  3. addr | edit/del | reply kokobook 2012.07.02 15:41 신고

    근대 힙합 씬 잘읽고 갑니다. 질 높은 컨텐츠 볼 수록 빠져드네요~

  4. addr | edit/del | reply 백제 2012.07.03 10:43 신고

    아 볼수록 콘서트 기다려진다 ㅠㅠ


예상을 뛰어넘는 감동과 놀라움. 현대카드만의 초대형 공연 프로젝트,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그 17번째 주인공은 에미넴입니다. 살아있는 미국의 힙합 역사이자 힙합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에미넴. 에미넴의 등장 이래 힙합계의 역사가 재편되었다는 평가처럼 1990년대 정통 힙합계는 끊임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전과 전성기를 이끌어내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발전한 힙합계의 주요 포인트와 그 발전상을 짚어봅니다. 그 첫번째로 본격적인 힙합의 전성기를 연 1990년대 힙합 음악들에 대해 대중음악평론가 한동윤님의 글로 논해봅니다.


커티스 블로(Kurtis Blow)의 메이저 레이블 계약, ‘Rapper's Delight’의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 런 디엠시(Run–D.M.C.)의 멀티 플래티넘 기록 등으로 힙합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인기 장르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상업적 성공 기반을 다지는 것 외에도 1980년대의 힙합은 여러 종류의 파격과 발전을 도모하며 예술성과 작품성을 구현했고, 세를 확장하면서 장르의 지형도를 구축했다. 랩이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음반 산업의 변방이었던 남부 지역에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투 라이브 크루(2 Live Crew), 흑인 사회 밖으로 힙합의 향유층을 넓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갱스터 랩의 견인차 역할을 한 엔더블유에이(N.W.A) 등이 그러한 과정의 중앙에 섰다. 힙합은 나날이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져 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변화와 확산은 한층 속도를 높였다. 이제 힙합은 확실히 주류 시장으로 진입했으며, 일부에서는 힙합을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보였다. 또한, 동부와 서부, 남부 등 각 지역은 그곳을 대표할 만한 특징적인 음악을 선보여 음악팬들에게 부가적인 흥미를 제공했다. 90년대를 ‘힙합의 융성기’라 부르는 것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하드코어 힙합의 격렬한 발화
 
동부는 80년대 말 서부에서 만개한 갱스터 랩의 인기에 밀려 대중의 관심을 덜 받았지만 1993년 출시된 우 탱 클랜(Wu-Tang Clan)의 기념비적인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를 기점으로 헤게모니를 탈환하게 된다. 드럼을 강조한 팍팍한 리듬과 단조의 피아노 선율을 덧대 음울함을 극대화한 반주, 으르렁거리듯 공격적으로 터뜨리는 래핑의 묘한 조화가 청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후, 나스(Nas)의 데뷔작 Illmatic에 수록된 ‘N.Y. State Of Mind’, 몹 딥(Mobb Deep)의 존재감을 높여 준 두 번째 앨범 The Infamous의 ‘Shook Ones (Part II)’처럼 어둡고 탁한 느낌을 특징으로 하는 곡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여기에 더블 엑스 파시(Double X Posse), 조인트 벤처스(Joint Ventures), 다스 이펙스(Das EFX), 킹 저스트(King Just) 같은 래퍼들의 합세로 둔중한 드럼과 과격한 노랫말을 앞세운 하드코어 힙합이 동부에서 광범위한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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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양식은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얻었을 뿐, 차트에서의 힘은 대체로 미미했기에 힙합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황 탓에 퍼프 대디(Puff Daddy)의 출현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띤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하드코어 힙합이 시들해질 무렵, 과거에 큰 인기를 얻었던 노래를 차용하고 코러스를 대대적으로 대입하는 대중성을 우선에 둔 특유의 편곡으로 힙합의 인기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노토리어스 비아지(The Notorious B.I.G.)의 처녀작 Ready To Die 중 두 곡 ‘Big Poppa’, ‘One More Chance’이 싱글 차트 10위권 안에 올랐으며, 1997년에는 자신의 데뷔 앨범 No Way Out 을 크게 히트시켰다. ‘I'll Be Missing You’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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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동부를 빛낸 수많은 명작 가운데, 지역의 음악적 특색을 설명하며 작품성을 만족하는 것으로 라킴(Rakim)의 솔로 데뷔 음반 The 18th Letter를 꼽을 수 있다. 힙합 마니아들이 동부 힙합의 매력 중 하나로 언급하는 붐 뱁(boom bap, 드럼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로 비트와 리듬을 강조한 힙합 음악) 스타일의 비트를 시종 내보이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피트 록(Pete Rock),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 디제이 클라크 켄트(DJ Clark Kent)가 빚어내는 찰기 그득하고 탄력적인 리듬은 힙합 악곡 구성의 모범이라고 할 만큼 멋스럽다. 라킴의 화려한 라임 연출이 두 번째 이유. 그는 각운뿐만 아니라 문장 중간의 허리운까지 정교하게 맞춤으로써 랩을 더욱 부드럽게 가공하고, 듣는 재미까지 충족했다. 재치 넘치는 언어 구사, 빠르면서도 깔끔한 플로우로 찬사를 받은 랩 슈퍼스타 에미넴(Eminem)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라킴을 거론하곤 했다.


나른함 속의 중독성, 서부를 달군 지 펑크 시대

동부와 마찬가지로 서부 역시 가사에서 과격한 기조를 나타냈으나 음악은 나긋나긋했다. N.W.A시절에 단초를 제공한 닥터 드레(Dr. Dre)의 신종 장르 지 펑크(g-funk)9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출현하면서 서부의 힙합을 대변했다. 펑크(funk) 음악에서 가져온 무게감 있는 드럼 루프, 얼핏 신경질적으로 들리지만 몽환적인 느낌이 나는 고음의 신시사이저 연주가 특징인 이 음악은 1992년에 나온 닥터 드레의 첫 솔로 앨범 The Chronic과 이듬해 출시된 스눕 도그(Snoop Dogg)의 Doggystyle의 흥행에 힘입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트윈즈(Twinz), 디제이 퀵(DJ Quik), 코케인(Kokane) 등이 지 펑크의 흐름에 동참했다. 닥터 드레의 이복 동생인 워렌 지(Warren G) 역시 지 펑크를 선보였으나 기존의 틀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부드러움을 강조한 음악을 들려줬다.

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랩 솔로 퍼포먼스’를 수상한 닥터 드레의 ‘Let Me Ride’, 다음해 같은 부문 후보에 오른 워렌 지의 ‘This D.J.’, 스눕 도그의 ‘Gin And Juice’는 세월이 흘러도 힙합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지 펑크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서부 힙합이 인기를 얻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닥터 드레는 이후 거물 신인 에미넴의 음반을 제작하고 주류에 입성시킴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비트 마에스트로와 거칠 것 없는 영민한 MC의 만남은 힙합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축포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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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힙합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뮤지션이 하나 더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더한 실력자 투팍(2Pac). 시원하게 도로를 달리는 것 같은 유려한 래핑, 갱스터 래퍼임에도 ‘Dear Mama’처럼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가사도 쓸 줄 아는 능력, 라임을 정교하게 배열하는 재능은 그의 비범함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1995년에 출시한 Me Against The World는 성폭행 혐의로 복역 중이었음에도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안타깝게도 동부 힙합의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와의 살벌한 다툼은 두 인재를 모두 앗아가는 비극으로 끝나 힙합 역사의 어두운 일면으로 남았다.



경쾌한 댄스음악과 독창성으로 돋보인 남부 힙합
 
반면 남부는 빠른 음악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일렉트로 펑크(electro funk)에서 착안한 오밀조밀하고도 날렵한 비트와 파티를 찬양하는 흥겨운 노랫말의 마이애미 베이스(Miami bass)는 90년대 초중반 남부 힙합의 중심 양식으로 등극했다. 우리나라 나이트클럽에서도 줄기차게 나왔던 태그 팀(Tag Team)의 ‘Whoomp! (There It Is)’와 식스티나인 보이즈(69 Boyz)의 ‘Tootsee Roll’, 쿼드 시티 디제이스(Quad City DJ's)의 ‘C'mon N' Ride It (The Train)’은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남부가 더는 음반 시장의 변두리가 아님을 역설했다.

오직 마이애미 베이스만이 남부의 힙합 신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흑인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과 독창적인 스타일로 평단이 주시하던 아웃캐스트(OutKast), ‘Jump’로 유소년 힙합 뮤지션으로서는 최대의 흥행을 달성한 크리스 크로스(Kris Kross)도 이 지역의 한 축이었다. 더운 기후 탓에 80년대부터 남부 힙합 뮤지션들은 유희를 즐기는 내용을 노랫말로 많이 다뤄 왔다. 하지만 어레스티드 디벨로프먼트(Arrested Development)는 1993년 그래미 시상식 ‘최우수 랩 퍼포먼스 듀오/그룹’ 부문을 수상한 ‘Tennessee’와 ‘Mr. Wendal’ 등으로 불평등과 가난으로 소외받는 흑인들의 삶을 기술하며 메시지에 중점을 둔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쾌한 반주와 놀이를 갈구하는 노랫말, 때로는 정형화된 틀을 탈피하려는 움직임 등 남부 힙합의 특징들을 포괄하는 작품이 아웃캐스트의 1998년 앨범 Aquemini 일 것이다. 이 듀오는 즐거운 에너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면서도 리듬 앤 블루스와 컨트리, 록과 전자음악의 요소를 결합하면서 아주 이채로운 모양의 힙합을 완성해 냈다. 음악적인 다채로움 외에도 사회에 깔린 이런저런 문제들을 건드리는 주제의 다양한 접근은 미국 전역으로 하여금 아웃캐스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실험성을 우선에 둔 음악과 백인 래퍼들의 등장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색다른 음악의 등장도 90년대를 수놓았다. 디바인 스타일러(Divine Styler)는 1992년 출시된 2집 Spiral Walls Containing Autumns Of Light 에서 규칙성을 파괴한 구성으로 퓨전의 난해한 상(像)을 제시했고, 디제이 섀도(DJ Shadow)와 믹스 마스터 마이크(Mix Master Mike)는 디제이가 주인공이자 감독이 되는 비트와 소리 중심의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 개척에 앞장섰다. 컴패니 플로(Company Flow)와 라티릭스(Latyrx)도 힙합의 보편적인 틀을 깨는 작품으로 신선미를 선사했으며, 1999년 프린스 폴(Prince Paul)은 자신의 두 번째 앨범 A Prince Among Thieves를 통해 극의 형식미를 청각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랩 오페라를 완성했다.


백인 래퍼들의 진출 또한 확대됐다. 비스티 보이즈가 데뷔 초기에는 흑인들의 문화를 가로챈다며 흑인 사회의 원성을 샀지만 그들은 분명히 백인 힙합 뮤지션이 출현하는 데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가벼운 댄스음악을 앞세워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한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를 비롯해 근육질의 몸매를 드러내며 힙합계의 섹시 아이콘으로 등극했던 마키 마크(Marky Mark), ‘Jump Around’로 전 세계 클럽을 강타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그룹 하우스 오브 페인(House Of Pain), 이름과는 달리 흑인 멤버가 하나도 없었던 영 블랙 틴에이저스(Young Black Teenagers), ‘Informer’로 7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지킨 캐나다의 문제아 스노(Snow) 등이 90년대 힙합 신의 지분을 배정받았다.


새천년을 맞이할 즈음 에미넴이 이들의 배턴을 이어 받게 된다. 그는 1999년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이자 첫 메이저 데뷔작인 The Slim Shady LP를 통해서 매체와 대중의 시선, 상업적인 성공을 한꺼번에 획득했다. 맹렬한 태도를 내보이면서 듣는 이를 단숨에 끌어당기는 매끈한 래핑을 구사해 그 어떤 백인 래퍼보다 돋보였다. 에미넴은 닥터 드레가 발굴한 진귀한 원석이었으며, 새천년 힙합 신을 빛낼 값진 보석이었다.



한동윤 (http://soulounge.egloos.com)
대중음악 평론가. CBS [한동준의 FM Pops] 작가. [힙합 열전: 음반으로 보는 英美 힙합의 역사] 저자.
공식적으로는 춤을 접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힙합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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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에미넴최고 2012.06.05 19:07 신고

    그냥 에미넴이 최고에요 짱입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Hip hop 2012.06.06 09:49 신고

    우오. 힙합 공부하고갑니다,, 글 잘 읽었어용

  3. addr | edit/del | reply 몰입 2012.06.07 10:21 신고

    숨도 안쉬고 읽은듯하다 ...

  4. addr | edit/del | reply 코프만 2012.06.15 18:38 신고

    난 그래도 에미넴..내가 추종자임

  5. addr | edit/del | reply 슈3花 2012.06.19 17:28 신고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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