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전문가 칼럼' (1건)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거장의 필모그래피,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모든 것

‘영화감독’이라는 보통명사를 떠올릴 때, 스탠리 큐브릭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고유명사를 찾긴 힘들 것이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감독’이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수십 권의 책을 읽는 건 기본, 단 하나의 디테일을 위한 수십 번씩 촬영과 밤샘 작업도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타고난 열정과 영화적 상상력 그리고 완벽주의의 폭발적인 시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그의 20세기 영화들은 21세기의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강렬한 체험이다. 11월 29일부터 내년 3월 13일까지 이어지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에서는 아시아 최초이자 역대 최대 규모로 스탠리 큐브릭의 독보적인 영화인생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사진에서 영화로,
단편 다큐 감독이 된 스탠리 큐브릭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난 스탠리 큐브릭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예술분야에 대한 관심이 컸다.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를 빼먹는 일은 다반사. 그리스 신화와 그림 형제의 동화에 빠져 있었고, 재즈를 좋아해 드럼을 배우기도 했다. 12살 때 의사인 아버지에게 배운 체스는 그의 평생 취미가 되었다. 가장 심각한 취미는 사진.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카메라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고 대학은 엄두도 못 낼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그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18세의 나이로 <LOOK>의 견습생이 된 ‘포토그래퍼 큐브릭’은 포토 에세이까지 출간하며 승승장구한다.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져 스무 살 즈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영화를 보며 독학을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51년. <LOOK> 시절 알았던 복서 월터 카르티에에 대한 18분짜리 단편 다큐 <시합 날>(1951)이 그 시작이었고, 어느 목사의 여정을 담은 <플라잉 파드레>(1951)에 이은 <선원들>(1953)은 최초의 컬러 영화였다. 이후 62분짜리 전쟁 드라마 <공포와 욕망>을 통해 극영화를 시도했는데 평단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엔 실패했고, 헤비급 복서의 이야기를 다룬 67분짜리 필름 느와르 <킬러스 키스>(1955)는 실험적인 앵글과 조명에도 불구하고 플롯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교훈으로 삼았고, 결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첫 흥행작으로 성공을 맛보다

워싱턴 스퀘어에서 내기체스를 두며 생활비를 벌던 시절, 큐브릭은 프로듀서 제임스 B. 해리스를 만난다. 1955년에 ‘해리스-큐브릭 프로덕션’을 설립한 둘은 할리우드에 한 걸음 가까워졌고 드디어 1956년에 첫 장편영화 <킬링>을 만들었다.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했고 시사 주간지 「TIME」에선 큐브릭을 오슨 웰즈와 비교하기도 했다. 두 시간대를 동시에 다루는 혁신적인 플롯 방식은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후문.

장편 데뷔작의 강렬함 덕에 영화사 MGM에서 차기작 제의를 받았고, 험프리 코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반전 영화 <영광의 길>(1957)은 그의 첫 흥행작이 되었다. 전투 신엔 6개의 카메라가 돌아갔고, 큐브릭도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 팀의 일원이 되었는데 1차 대전의 전장을 그 어떤 감상주의도 없이 가차 없는 리얼리즘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가 성공하자 의외의 거물이 큐브릭에게 연락을 했다. 바로 배우 말론 브란도. 그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애꾸눈 잭>(1961)의 연출을 의뢰했지만 재능있는 젊은 감독과 스타 사이의 줄다리기로 결국 이 영화는 브란도가 직접 연출한다.

예술가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롤리타의 탄생

배우와의 갈등은 반복되었다. <영광의 길>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큐브릭에게 1만 명의 엑스트라와 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스파르타쿠스>(1960)을 제안했는데, 큐브릭은 현장 통제권을 두고 더글러스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할리우드 사상 최대 규모의 영화답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4개의 트로피를 얻었지만, 큐브릭은 성공이라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영화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력’이었기 때문.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의 하트퍼드셔의 차일드위크베리 저택을 평생의 일터로 삼는다. 이곳에서 작품 구상과 편집을 했고, 자료를 쌓아두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다. 영국에서의 첫 영화는 바로 <롤리타>(1962). 비교적 지명도가 낮은 원작을 골라 영화화했던 큐브릭에게 예외가 있다면 이 영화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을 옮긴 작품으로, 피터 셀러스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이례적으로 즉흥 연기를 허락했다. 원작의 에로틱한 요소를 상당 부분 걷어냈음에도 논란이 됐지만, 평단은 큐브릭에게 무한 지지를 보냈다.

엄청난 독서와 리서치로
걸작을 만들다

큐브릭은 셀러스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는 부조리한 유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셀러스는 무능한 대통령, 공군 대위, 나치 출신 과학자 1인 3역을 맡아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다. 큐브릭은 냉전 시대의 핵 공포를 풍자한 이 작품을 위해 4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후문. 평단의 엇갈린 반응에 대해 큐브릭은 “풍자 작가는 인간의 본성에 회의적인 관점을 갖는 동시에 조크를 만들어내는 낙관주의도 지녀야 한다.”며 대응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와 함께 큐브릭의 위대한 작업이 시작된다. 그는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엄청난 양의 리서치를 했고, NASA의 허락을 받아 정보를 얻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 세대 감독들에겐 빅뱅과도 같았던 영화”라고 정의하기도 한 이 영화는 상상력과 과학의 놀라운 결합이자, 신과 인간과 미래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상징을 표현한 작품이다.

미완성ㆍ미상영작품에 담긴
큐브릭의 좌절

스탠리 큐브릭의 필모그래피엔 수많은 ‘미완성 프로젝트’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작품으로 <나폴레옹>을 꼽을 수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이후 그는 나폴레옹의 자기 파괴적인 삶을 스크린에 옮기려 했고, 2년 동안 관련 서적만 100권 넘게 읽었으며, 잭 니콜슨과 오드리 헵번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비 부담으로 MGM이 발을 빼면서 갑자기 촬영이 취소되었고 큐브릭의 <나폴레옹>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후 적은 예산으로 짧은 기간 작업한 <시계태엽 오렌지>(1971)가 갖은 논란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인간의 폭력성과 교화에 대한 이 영화는 모방 범죄로 인해 영국에선 결국 상영 철회되었고 1999년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프렌치 커넥션>(1971)의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트로피를 차지했는데, 그는 “올해 최고의 감독은 큐브릭이다. 아니, 올해뿐 아니라 영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장르의 탐색가

범죄 영화에서 시작해 전쟁 영화, 에픽, 코미디, SF를 거친 그의 행보는 18세기 배경의 시대극 <배리 린든>(1975)에 당도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정점에 달했던 영화 기술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이 이 영화에서도 이어지는데, 인공 조명 없이 촛불만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명장면 중 하나. NASA를 위해 개발한 자이츠 렌즈로 촬영했고, 산광 효과가 결합된 평면적 화면은 당대 회화를 연상시켰다. 아카데미 촬영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부터 공포 영화를 기획했지만 <엑소시스트>(1973) 연출 제의를 거부하며 자신에게 좀 더 맞는 프로젝트를 기다리던 큐브릭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한 <샤이닝>(1980)을 연출한다. 심할 땐 한 장면을 100번 넘게 촬영하기도 했던 이 영화는, 영화사상 최초이자 최고로 스테디캠이 사용된 작품. 그의 행보는 점차 느려져 <풀 메탈 재킷>(1987)이 7년 만에 발표된다. 전쟁 영화임에도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 작품을 위해 북아프리카에서 야자 나무 200그루가 옮겨졌다. 그리고 12년이 흘러 스탠리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이 나왔는데 그는 결국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기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작 그리고 <에이.아이.>

어느 부부의 섹스 오디세이를 다룬 <아이즈 와이드 셧>을 촬영하면서, 70세의 노인은 15개월 동안 쉬지 않았고 어떤 기간엔 하루에 18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결국 유작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 1999년에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개봉과 함께 세상은 마지막까지 완벽주의자였던 스탠리 큐브릭에게 경의를 표했다. 2001년, 큐브릭과 스필버그가 오래전부터 함께 했던 <에이.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촬영 내내 큐브릭의 영혼이 함께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이 영화는 가장 큐브릭적인 관점에 입각해 만든 SF 동화였다.
영화 역사가 미셸 시멍의 말처럼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스탠리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의 ‘위대한 유산’은 숫자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무게이자 존재감이다. 현대카드의 19번째 컬처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선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만들어낸 13편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안타깝게 스크린에 옮기지 못했던 미완성작 ‘나폴레옹’에 이르기 까지, 스탠리 큐브릭이 일생 동안 남긴 모든 작품들을 집대성한 스탠리 큐브릭 전을 통해 이 위대한 거장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수많은 장르를 아우르며 현존하는 영화감독들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걸작을 남겼고, 영화 기술의 위대한 개척자였으며, 영화 제작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꿈꾸었던 완벽주의자였던 스탠리 큐브릭은 자신이 남긴 영화와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Writer. 김형석
영화 평론가
현대카드 컬쳐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거장의 필모그래피,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모든 것
‘영화감독’이라는 보통명사를 떠올릴 때, 스탠리 큐브릭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고유명사를 찾긴 힘들 것이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감독’이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수십 권의 책을 읽는 건 기본, 단 하나의 디테일을 위한 수십 번씩 촬영과 밤샘 작업도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타고난 열정과 영화적 상상력 그리고 완벽주의의 폭발적인 시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그의 20세기 영화들은 21세기의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강렬한 체험이다. 11월 29일부터 내년 3월 13일까지 이어지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에서는 아시아 최초이자 역대 최대 규모로 스탠리 큐브릭의 독보적인 영화인생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사진에서 영화로, 단편 다큐
감독이 된 스탠리 큐브릭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난 스탠리 큐브릭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예술분야에 대한 관심이 컸다.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를 빼먹는 일은 다반사. 그리스 신화와 그림 형제의 동화에 빠져 있었고, 재즈를 좋아해 드럼을 배우기도 했다. 12살 때 의사인 아버지에게 배운 체스는 그의 평생 취미가 되었다. 가장 심각한 취미는 사진.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카메라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고 대학은 엄두도 못 낼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그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18세의 나이로 <LOOK>의 견습생이 된 ‘포토그래퍼 큐브릭’은 포토 에세이까지 출간하며 승승장구한다.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져 스무 살 즈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영화를 보며 독학을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51년. <LOOK> 시절 알았던 복서 월터 카르티에에 대한 18분짜리 단편 다큐 <시합 날>(1951)이 그 시작이었고, 어느 목사의 여정을 담은 <플라잉 파드레>(1951)에 이은 <선원들>(1953)은 최초의 컬러 영화였다. 이후 62분짜리 전쟁 드라마 <공포와 욕망>을 통해 극영화를 시도했는데 평단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엔 실패했고, 헤비급 복서의 이야기를 다룬 67분짜리 필름 느와르 <킬러스 키스>(1955)는 실험적인 앵글과 조명에도 불구하고 플롯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교훈으로 삼았고, 결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첫 흥행작으로 성공을 맛보다

워싱턴 스퀘어에서 내기체스를 두며 생활비를 벌던 시절, 큐브릭은 프로듀서 제임스 B. 해리스를 만난다. 1955년에 ‘해리스-큐브릭 프로덕션’을 설립한 둘은 할리우드에 한 걸음 가까워졌고 드디어 1956년에 첫 장편영화 <킬링>을 만들었다.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했고 시사 주간지 「TIME」에선 큐브릭을 오슨 웰즈와 비교하기도 했다. 두 시간대를 동시에 다루는 혁신적인 플롯 방식은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후문.

장편 데뷔작의 강렬함 덕에 영화사 MGM에서 차기작 제의를 받았고, 험프리 코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반전 영화 <영광의 길>(1957)은 그의 첫 흥행작이 되었다. 전투 신엔 6개의 카메라가 돌아갔고, 큐브릭도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 팀의 일원이 되었는데 1차 대전의 전장을 그 어떤 감상주의도 없이 가차 없는 리얼리즘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가 성공하자 의외의 거물이 큐브릭에게 연락을 했다. 바로 배우 말론 브란도. 그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애꾸눈 잭>(1961)의 연출을 의뢰했지만 재능있는 젊은 감독과 스타 사이의 줄다리기로 결국 이 영화는 브란도가 직접 연출한다.

예술가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롤리타의 탄생

배우와의 갈등은 반복되었다. <영광의 길>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큐브릭에게 1만 명의 엑스트라와 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스파르타쿠스>(1960)을 제안했는데, 큐브릭은 현장 통제권을 두고 더글러스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할리우드 사상 최대 규모의 영화답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4개의 트로피를 얻었지만, 큐브릭은 성공이라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영화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력’이었기 때문.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의 하트퍼드셔의 차일드위크베리 저택을 평생의 일터로 삼는다. 이곳에서 작품 구상과 편집을 했고, 자료를 쌓아두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다. 영국에서의 첫 영화는 바로 <롤리타>(1962). 비교적 지명도가 낮은 원작을 골라 영화화했던 큐브릭에게 예외가 있다면 이 영화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을 옮긴 작품으로, 피터 셀러스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이례적으로 즉흥 연기를 허락했다. 원작의 에로틱한 요소를 상당 부분 걷어냈음에도 논란이 됐지만, 평단은 큐브릭에게 무한 지지를 보냈다.

엄청난 독서와 리서치로
걸작을 만들다

큐브릭은 셀러스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는 부조리한 유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셀러스는 무능한 대통령, 공군 대위, 나치 출신 과학자 1인 3역을 맡아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다. 큐브릭은 냉전 시대의 핵 공포를 풍자한 이 작품을 위해 4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후문. 평단의 엇갈린 반응에 대해 큐브릭은 “풍자 작가는 인간의 본성에 회의적인 관점을 갖는 동시에 조크를 만들어내는 낙관주의도 지녀야 한다.”며 대응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와 함께 큐브릭의 위대한 작업이 시작된다. 그는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엄청난 양의 리서치를 했고, NASA의 허락을 받아 정보를 얻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 세대 감독들에겐 빅뱅과도 같았던 영화”라고 정의하기도 한 이 영화는 상상력과 과학의 놀라운 결합이자, 신과 인간과 미래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상징을 표현한 작품이다.

미완성ㆍ미상영작품에 담긴
큐브릭의 좌절

스탠리 큐브릭의 필모그래피엔 수많은 ‘미완성 프로젝트’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작품으로 <나폴레옹>을 꼽을 수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이후 그는 나폴레옹의 자기 파괴적인 삶을 스크린에 옮기려 했고, 2년 동안 관련 서적만 100권 넘게 읽었으며, 잭 니콜슨과 오드리 헵번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비 부담으로 MGM이 발을 빼면서 갑자기 촬영이 취소되었고 큐브릭의 <나폴레옹>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후 적은 예산으로 짧은 기간 작업한 <시계태엽 오렌지>(1971)가 갖은 논란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인간의 폭력성과 교화에 대한 이 영화는 모방 범죄로 인해 영국에선 결국 상영 철회되었고 1999년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프렌치 커넥션>(1971)의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트로피를 차지했는데, 그는 “올해 최고의 감독은 큐브릭이다. 아니, 올해뿐 아니라 영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장르의 탐색가

범죄 영화에서 시작해 전쟁 영화, 에픽, 코미디, SF를 거친 그의 행보는 18세기 배경의 시대극 <배리 린든>(1975)에 당도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정점에 달했던 영화 기술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이 이 영화에서도 이어지는데, 인공 조명 없이 촛불만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명장면 중 하나. NASA를 위해 개발한 자이츠 렌즈로 촬영했고, 산광 효과가 결합된 평면적 화면은 당대 회화를 연상시켰다. 아카데미 촬영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부터 공포 영화를 기획했지만 <엑소시스트>(1973) 연출 제의를 거부하며 자신에게 좀 더 맞는 프로젝트를 기다리던 큐브릭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한 <샤이닝>(1980)을 연출한다. 심할 땐 한 장면을 100번 넘게 촬영하기도 했던 이 영화는, 영화사상 최초이자 최고로 스테디캠이 사용된 작품. 그의 행보는 점차 느려져 <풀 메탈 재킷>(1987)이 7년 만에 발표된다. 전쟁 영화임에도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 작품을 위해 북아프리카에서 야자 나무 200그루가 옮겨졌다. 그리고 12년이 흘러 스탠리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이 나왔는데 그는 결국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기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작 그리고 <에이.아이.>

어느 부부의 섹스 오디세이를 다룬 <아이즈 와이드 셧>을 촬영하면서, 70세의 노인은 15개월 동안 쉬지 않았고 어떤 기간엔 하루에 18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결국 유작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 1999년에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개봉과 함께 세상은 마지막까지 완벽주의자였던 스탠리 큐브릭에게 경의를 표했다. 2001년, 큐브릭과 스필버그가 오래전부터 함께 했던 <에이.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촬영 내내 큐브릭의 영혼이 함께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이 영화는 가장 큐브릭적인 관점에 입각해 만든 SF 동화였다.
영화 역사가 미셸 시멍의 말처럼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스탠리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의 ‘위대한 유산’은 숫자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무게이자 존재감이다. 현대카드의 19번째 컬처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선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만들어낸 13편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안타깝게 스크린에 옮기지 못했던 미완성작 ‘나폴레옹’에 이르기 까지, 스탠리 큐브릭이 일생 동안 남긴 모든 작품들을 집대성한 스탠리 큐브릭 전을 통해 이 위대한 거장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수많은 장르를 아우르며 현존하는 영화감독들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걸작을 남겼고, 영화 기술의 위대한 개척자였으며, 영화 제작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꿈꾸었던 완벽주의자였던 스탠리 큐브릭은 자신이 남긴 영화와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Writer. 김형석영화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ingenv.tistory.com singenv 2015.11.07 22:04 신고

    저도 은근 그 분의 작품이 접했군요. 기회가 되면 13편 모두를 일별하고 싶습니다.

현대카드 패션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