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프로젝트 23 Beck/현장스케치' (1건)


혜성처럼 등장해 90년대 음악 씬의 패러다임을 바꾼 아티스트 벡(Beck)이 드디어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공연을 갖게 됐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최근 작 [Morning Phase] 같은 앨범이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을 수상하는 등 여전히 그는 현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라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번 내한 공연의 경우 그의 다양한 경력을 골고루 접할 수 있었던 지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의 음악을 사랑해온 팬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알찬 구성의 공연 아니었나 싶다.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적, 이상순, 장기하와 아이유 커플, 김씨, 호란 등 국내의 유명한 뮤지션, 아티스트들의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척수손상으로 인해 허리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사실 이번 공연에서는 좀처럼 그런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활기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벡은 스테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엔터테이너, 그리고 혁명적인 예술가 사이의 모습을 보여줬다. 선곡, 그리고 무대 구성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적인 요소들을 감지케 했는데, 다양한 샘플들을 오려 붙였던 앨범들을 착실하게, 하지만 더욱 임팩트있게 라이브 사운드로 체험하게끔 유도해냈다. 샘플링된 음원 위에 올려지는 연주는 확실히 그 박력이 달랐다. 무엇보다 벡의 현란한 듯 과장되지 않은 춤사위는 볼 때마다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팬들을 위한 선곡의 배려가 엿보였다. 현대카드 주최의 공연이었던 만큼 가사에 '현대 차'가 들어가는 1999년도 곡 'Debra', 그리고 최근에는 공연에서 거의 하지 않았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삽입곡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등을 부르면서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유도해냈다. 심지어 ‘Debra’는 공연 이전에 미리 전달받은 셋리스트에도 없었던 곡이었다.



관객들부터 벡 본인에 이르기까지, 공연 시작 직전의 초조한 기다림







일찌감치 입장시간 이전부터 모여든 관객들은 나무그늘 아래서 입장순서를 기다렸다.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은 내부 로비와 외부 입구 옆에 마련된 벡의 사진이 있는 포토월 앞에서 사진촬영을 이어나갔고, 현대카드 슈퍼시리즈 공연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는 히스토리월을 찬찬히 살펴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심지어는 벡 자신 또한 포토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한국에서의 최초 공연을 앞둔 설레는 마음을 마음껏 드러냈다. 머천다이즈 판매부스 역시 인기가 있었는데, 판매하던 티셔츠에는 ‘두 개의 턴테이블과 하나의 마이크’가 그려져 있는 ‘Where It’s At’ 싱글 커버가 인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입장하자마자 장내에는 과연 벡의 공연답게 정체 불명의 다양한 성격의 곡들이 흘러나왔다. 썬더캣(Thundercat),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 부터 베이비 휴이(Baby Huey) 같은 60년대 소울 훵크라던가, 뉴 스쿨 힙합 같은 것들이 마치 벡의 음악처럼 제멋대로 이어졌다. ELO의 'Mr. Blue Sky'가 흐르고 웅장한 곡의 결말과 함께 조명이 소등되면서 바로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 초반부를 달군 익숙한 기타 리프 중심의 대표곡들


붉은 조명 아래 노란색 실버톤 H42 기타를 든 벡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올해 발매 20주년을 맞이한 걸작 앨범 [Odelay]의 첫 곡 'Devil's Haircut'으로 공연의 막이 오른다. 혼란스런 숫자를 배경으로 두 명의 기타연주자가 같은 음의 기타솔로를 더블링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인사 직후 'Black Tambourine'를 연주하면서는 박수를 유도해내기도 했다.


벡의 대표곡 'Loser'의 익숙한 슬라이드 기타 소리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예전의 라이브 버전 보다는 좀더 원곡에 충실한 듯한 어레인지를 들려줬는데, 벡을 대표하는 이 히트곡에서 관객들의 떼창이 지속됐다. 'Loser'를 조금 이른 타이밍에 부른 감이 없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늘 공연장을 찾은 것이었다.





LA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는 말과 함께 그의 노래 'Hollywood Freaks'에 한국이 등장했던 가사 "Pop locking' beats from Korea"라는 추임새를 넣기도 하면서 라틴/힙합 풍의 'Que Onda Guero'를 불렀다. 소울풀한 곡을 원하느냐고 관객들에게 물은 직후에는 'Mixed Bizness'를 연주하면서 훵키한 비트 아래 마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백 밴드에서나 나올 법한 드럼 솔로를 작렬시켜내기도 했다. [Odelay] 앨범에 수록된 히트 곡 'The New Pollution'의 경우 직접 탬버린을 치면서 불렀는데, 강렬한 푸른 조명으로 곡을 종료시켜낸다.



유독 공연장에서 두드러진 하드록 트랙들


소리의 파동을 붉은 선으로 표현해낸 배경 아래 마치 잭 화이트(Jack White)스러운 박력으로 'Soul of a Man'을 소화해내면서 장내를 불태웠다. 형형색색의 배경아래 펼쳐진 'Think I'm in Love'의 경우엔 도나 썸머(Donna Summer)의 클래식 'I Feel Love'을 매쉬업하면서 벡 다운 재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무거운 리프들이 관객들을 때리는 'Go It Alone'에서도 유독 원곡보다 강렬한 형태로 어레인지해내면서 분위기를 뜨겁게 유도해갔다. 큰 볼륨으로 듣기에 적합한 노래들이다.





신작 [Morning Phase] 중심의 차분한 포크 곡들


공연 초반부 내내 하드한 곡들을 이어나가다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정반대 분위기의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분위기전환용 구색 맞추기가 아닌, 벡의 또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챕터라 칭하는 편이 옳다. 사실 벡은 포크 아티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벡의 걸작 발라드 앨범 [Sea Change]에 수록된 'Lost Cause'로 포크 챕터가 시작된다. 이후 [Morning Phase]의 곡을 몇 개 하겠다 말하면서 미묘한 박자임에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Blackbird Chain', 배경의 뿌연 잔상이 더욱 싸이키한 무드를 자아내는 촉촉한 'Heart Is a Drum', 그리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점차 고조시켜가는 'Blue Moon'을 차례로 이어냈다.


특히 이 챕터에서는 유독 업라이트 피아노 소리가 청명한 울림을 선사했는데, 이런 부드러운 레퍼토리가 전개됨에도 객석에서는 괴성이 터져나와 과연 벡의 공연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공연 레퍼토리에는 없었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삽입곡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을 부른 것도 이색적이었다. 이 곡을 연주할 때 LED 배경화면에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은 채 진행됐는데, 아마도 한국측에서의 즉흥적인 리퀘스트에 의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첫 소절이 흐르자 관객들이 환호했지만 이내 침묵을 유지하면서 곡에 빠져들어갔다. 벡의 공연 시작 바로 직전에 흘렀던 ELO의 'Mr. Blue Sky' 역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흘렀던 곡이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흥미로운 연결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곡들에서 어른스럽고 섬세한 모습의 벡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도 어느덧 40대 중반이다.





댄싱 머신 벡과 함께하는 댄스타임


90년대 벡의 팬이라면 그의 나이브한 브레익 댄스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그에 대한 갈증이 해소됐다. 작년에 싱글로 공개된 'Dreams'를 시작으로 댄스 플로어 용 곡들이 이어졌다. 'Girl'을 공연하기 이전에는 미리 관객들에게 떼창 연습을 시키기도 했고, 'Sexx Laws'에서는 드디어 그의 현란한 제임스 브라운 스텝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공연은 다시금 장내를 뒤흔들어 놓는 하드 록 'E-Pro'로 완료됐다. 무엇이 진짜 벡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너희들을 제압하고 보겠다는 듯 스테이지를 불태우고는 퇴장한다. 사람들은 밴드가 무대 위를 떠났음에도 'E-Pro'의 후렴구를 떼창하며 앵콜을 기다렸다.





셋리스트에도 적혀있지 않았던 예상 밖의 앵콜


기타 연주자 제이슨 포크너가 최고라는 사인을 보이며 무대 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은 왠 슬로우잼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이 곡은 기존에 전달받았던 셋리스트에는 없는 곡이었다. 이 노래의 정체는 아는 사람들은 아는 벡의 1999년도 곡 'Debra'였는데, 사실 이는 그의 공연에서 비교적 드물게 연주되는 곡이었다. 노래가사에는 실제로 '아가씨, 내 현대 차에 올라 타세요'라는 대목이 있었고, 때문에 당시 국내 음악잡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벡은 원곡의 가사 대신 '코엑스 몰에 다녀왔다'는 식의 나레이션을 새로 집어넣으면서 이 헐렁한 슬로우 잼을 완성했는데 후렴구절, 그리고 '현대 자동차'가 나오는 부분만큼은 제대로 불렀다. 특히 그는 '현대'라는 말을 반복했으며, 이는 마치 자신의 첫 내한이 현대카드가 주최가 될 것임을 이미 1999년도에 알았다는 듯한 제스처처럼 보이곤 했다. 이 곡이 흘러나오는 내내 객석에서는 꽤나 유쾌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설마 했지만 결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늘 공연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오늘은 단 한번뿐'이라는 말과 함께 벡의 히트곡 'Where It's At'이 이어졌다. 곡을 진행시키는 와중 갑자기 앰프 위에 앉더니 멤버들의 솔로타임이 진행됐다. 베이시스트 웨인 무어는 쉬크(Chic)의 'Good Times'를, 기타 연주자 제이슨 포크너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China Girl'을 연주했는데, 이에 맞춰 벡이 데이빗 보위의 모창을 시전하기도 했다. 로저 조셉 매닝 쥬니어는 벡이 샘플링하기도 했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Home Computer'를, 그리고 드러머 조이 워론커는 프린스(Prince)의 '1999'를 부르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멤버 소개가 끝나고 카운트다운 이후 다시 벡의 'Where It's At'을 광란의 분위기로 이어내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벡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백업 연주자들


언제나 그랬듯 벡의 투어 멤버들은 화려한 편이다. 기타, 그리고 키보드 멤버로는 모두 젤리피쉬(Jellyfish) 출신으로 벡과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제이슨 포크너(Jason Falkner)와 로저 조셉 매닝 쥬니어(Roger Joseph Manning Jr.)가 각각 함께했다. 로저 조셉 매닝 쥬니어는 네이트 루스(Nate Ruess)의 밴드 펀(Fun,)의 첫 앨범을 함께 만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드러머의 경우 라디오헤드(Radiohead)의 톰 요크(Thom Yorke)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의 플리(Flea)가 함께하는 프로젝트 아톰스 포 피스(Atoms for Peace)와 R.E.M. 등을 거쳐간 조이 워론커(Joey Waronker)가 배치되어 탄탄한 리듬라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앞에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얘기가 잠시 나왔는데, 현재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멤버인 조쉬 클링호퍼(Josh Klinghoffer) 역시 벡의 투어 기타리스트를 거쳐간 인물이기도 하다.





M83의 프로듀서, 그리고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투어 멤버로도 유명한 저스틴 멜달-존센(Justin Meldal-Johnsen)은 벡의 베이시스트로 꽤나 오랫동안 활동해왔는데, 이번 투어에서는 빠지면서 대신 웨인 무어(Wayne Moore)가 합류했다. 그는 퍼렐 윌리암스(Pharrell Williams)의 투어 베이시스트였고 주로 R&B 뮤지션들의 공연과 레코딩을 다뤄왔는데, 때문에 과거 저스틴 멜달-존센의 연주보다는 확실히 그루브감이 늘어난 듯한 인상을 줬다.



벡의 족적을 체험케 하는 무규칙 퍼포먼스


대표 곡을 거의 망라했고, 확실히 벡의 노래가 지닌 힘을 느끼게끔 하는 공연이었다. 카운터컬쳐가 메인스트림이 될 수 있는 시기에 등장해 빛을 발한 벡은 별개로 웰 메이드 포크 음반들을 병행해 완수해냈고, 따라서 다양한 팬층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 라이브는 이런 그의 족적을 추적하는 종합선물세트라 할만한 퍼포먼스였다. 벡의 음악에는 새로움과 낡음이 공존했고 불가사의한 리듬 속에서도 컨트리의 향기가 감지되곤 했다. 물론 공연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벡의 라이브에서는 항상 독특한 개성이 돌출됐다. 섬세하지만 완벽함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고수했고, 이는 감동적이면서 동시에 흥미진진했다. 원곡의 색다른 어레인지 또한 두드러졌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이 퍼포먼스의 형태 속에서 벡 고유의 세계관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었다. 다양한 소리를 뒤엉켜내면서 이상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창조해내는 것이 벡이 지닌 무기였고, 이는 말 그대로 '음악' 그 자체를 체험하게끔 하는 경험이었다. 그는 록 스타도, 랩퍼도, 그리고 댄스가수도 아니었다. 그저 ‘벡’ 자기 자신일 뿐이다.





Writer. 한상철

음악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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